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26. 순타태자(淳陀太子)





서기 513 6 백제는 다시 "하헤국 (伴跛国, 伴路國 오기)  우리나라의 코몬(己汶) 땅을 빼앗았읍니다천황의 은혜를 입어 돌려 받을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주청하였다

8 26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 죽었다(百済太子淳陀薨)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조에 기록된 위의 백제태자 사망기사(513) 그냥 흘러 넘길 없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백제태자의 사망기사를 다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5 (서기 597) 4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 보내 조공하였다(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 기사는 있지만 다음 그가 야마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2007 부여 왕흥사적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577 2 15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刹本舍 / 二枚葬時 / 神化爲三).”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에 의하여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도 일본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를 실었을 아니라 ()이란 글자를 사용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는 약간의 힌트를 남겨 두었다킨메이(欽明) 치세 13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 (箭田珠勝大兄皇子薨去) 기사를 짝으로 이해하면 양쪽 모두 (薨) 사용하고 있다. 킨메이 천황의 장자가 죽었다는 기사이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540 1 15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 세워 황후로 세웠다이시히메는 2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이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서기 552 죽었다고 기록했다.

리고 바로 이어서 553년부터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한번 보면 금방 눈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킨메이(欽明)치세 14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서기 557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는 서기 552 이후 사람은 야마토를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는 역사가들의 고심의 산물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야마토 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서기 513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는 백제 무령왕의 태자가 야마토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가 바로 킨메이(欽明)이다. 순타는 서기 509 또는 513 생으로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킨메이의 생몰년을 “509 – 571”로 보고 있으므로 순타태자가 509년 생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령왕이 백제왕이 다음 혼인한 백제의 황후 소생은 성명(聖明) 순타(淳陀 = 欽明)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령왕이 40세를 넘어 백제 왕이 되었으므로 왕이 출생한 후손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기 2001 12 18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 일본과 관계가 깊고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 조선(祖先)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순타가 킨메이 천황의 백제 이름이었다면 타카노 황후는 신분이 낮은 도래인 출신이 아니라 원래 황족의 일원이며 칸무(桓武)천황의 부계든 모계든 백제왕실의 후손이다.

일본서기의 서기 513년 순타태자와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의 사망기사는 단순히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보다 심오한 비밀을 그런 식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고 이해한다.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왕무의 상표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3년(477) 봄 2월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여름 4월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1(477) ()에서 사신이 와서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는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2(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백제는 진사왕과 아신왕 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아 국력신장의 기세가 꺾이고 가야와 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서기 455년 개로왕이 즉위하고 역내의 영향력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송서 순제 승명 2(478) ()에서 무()가 사신을 보내 장문의 상표문을 올렸다고 하였다. 표문은 무()의 아버지 제()가 동()으로 모인 55, (西)로 중이 66, 바다 건너 해북 95국을 평정하였다고 하였다.

모인 55국은 열도의 일본해 연안에 위치한 이즈모(出雲), 이나바(因幡), 타지마(但馬) 와카사(若狹), 후쿠이(福井) 지역을 말하며 이 곳에서 쿄우토(京都)를 거쳐 야마토()로 진입할 수 있다. 중이 66국은 큐우슈우의 오오스미(大隅), 사쯔마(薩摩), 히고(肥後), 히젠(肥前) 지역이다. 야마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전에 확보해야 되는 땅이다. 바다 건너 해북 95국은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있는 가야제국을 말하며 고구려의 공격으로 피폐해져 백제와의 결속력이 떨어진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한성 백제가 멸망하는 변을 당한다. 개로왕과 왕족들은 살해되었고 신라에 구원병을 얻기 위해 떠났던 여기(餘紀)가 살아 남은 사람들을 수습하여 웅진(熊津)으로 피난하였다. 여기(餘紀) 웅진에서 백제의 명맥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서기 477년 야마토()를 장악하고 있던 곤지(昆支)가 웅진에 나온 기록이 백제본기에 보인다. 곤지(昆支)는 송서에 좌현왕 여곤(餘昆)으로 기록되어 있고 경(慶, 개로왕), 기(紀, 문주왕), 곤(昆, 야마토의 세이네이 천황)은 형제간이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송서의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곤지가 백제에 나오던 서기 477년 무(武)가 야마토(倭)의 왕이 되었고 그가 송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된다.(구자일 설). 그러면 그는 누구일까? 일본서기는 당연히 유우랴쿠(雄略)라고 말 할 것이다. 서기 477년이면 461년 출생한 시마왕(斯麻王)이 16세가 되었고 그는 백제 개로왕의 장자이다. 나중 그는 백제의 무령왕이 되지만 무(武)라는 이름은 477년 그가 이미 쓰고 있었다고 본다. 송서에 보이는 왜왕무(倭王武)는 그 때까지 견사(遣使)한 다른 왜왕보다 강력한 것을 요구하였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고 고구려의 장수왕과 같은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요구하였다. 이는 백제와 왜의 정통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이다.

남제서 왜국전은 건원(建元) 원년(479) 왜왕무를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에서 진급하여 6국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양(梁) 천감(天監) 1(502) 왕조 수립과 함께 왜왕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남제(南齊)와 양()은 나라를 개국하자마자 왜왕무(倭王武)를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으로 깍듯하게 모시는 것은 왜왕무(倭王武)가 백제 개로왕의 장자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 4(479) 백제 23대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일본에 체류 중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00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내니 24대 동성왕이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야마토(倭)는 왜왕무의 어머니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 (488) ()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서기 488년 뜬금없이 중국 대륙의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승리하였다는 기사가 동성왕 10년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편이 갈려 있다.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인용되었다고 보이는데 자치통감 권 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488) 12월 조를 보면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가 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건강실록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에게 패전한 때는 484년이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백제와 북위는 484, 488, 490년 세번에 걸쳐 전쟁을 하여 484년에는 북위가 승전했으나 그 후 488, 490년 두 번의 전쟁에서는 백제가 대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 자치통감의 기록은 영명 2(484)의 사실을 영명 6(488)으로 그 연대를 착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서 백제전도 백제국은 본래 고려(高驪)의 무리로,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가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일컫는다라고 기록했다.

남제서는 양 나라의 소자현(簫子顯)이 편찬한 남제(479-502년)의 정사이다. 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의 동성왕은 490년 남제 조정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이번에 파견한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長史) 고달(高達)과,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楊茂)와,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會邁) 등 3인은 말과 행동이 맑고 밝아서 충성된 마음이 일찍부터 나타나서 지난 태시(泰始) 연간(465-471년), 함께 송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사옵고 이제는 신의 사신을 맡아 먼 바닷길 험한 데를 가서 그 지극한 효험을 나타냈아오니 마땅히 작위를 올려주어 삼가 먼저 예에 의하여 각각 행직을 주시기 바랍니다.  

달(達)은 변경을 잘 다스린 효험이 일찍부터 나타났고 공무에 부지런하고 수고로왔으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무(茂)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조금도 폐하지 않았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광릉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매(邁)는 뜻을 주밀히 갖고 여러 번 부지런한 효험을 나타냈사오니 이제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를 시키시옵소서라고 말하니, 남제 조정은 이를 모두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각각 장군 등의 호(號)를 하사해 주고, 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하며 또 사지절도독 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삼았다.

또 사신이며 배알자인 복사 손부(僕射孫副)로 하여금 모대(牟大)에게 명하여 그의 죽은 조부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 왕을 삼도록 했다. 또 조서를 내려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牟大)로 하니 이제 (大)는 죽은 조부 모도를 계승하여 백제왕을 삼는다. “라고 하였다.

이 해(490)에 위노(魏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수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幹那)를 보내어 노군(虜軍)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建武) 2(495)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부절과 부월을 받아 들고 오랑캐들을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姐瑾)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읍니다. 지난 경오(庚午)(490)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깊숙히 핍박하여 들어 왔읍니다.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처럼 들이치니 오랑캐들이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읍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을 베니 들판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읍니다. 이로 인해서 그 예기가 꺾여 고래같이 사납던 것이 흉한 모습을 감추어 이제는 나라 안이 조용해 졌읍니다.

그러하오니 그들의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沙法名)으로 행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을 삼고 찬수류(贊首流)로 행안국장군 벽중왕(辟中王)을 삼고 해례곤(解禮昆)으로 행무위장군 불중후(弗中侯)를 삼고 목간나(木幹那)는 전에 군공이 있었으니 이를 올려 행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를 삼으시옵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제수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견(慕遺), 행정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王茂),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과 행양무장군 진명(陳明)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 쓰며 국가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어려운 일을 행해서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읍니다. 이제 신의 사신의 책임을 맡겼사온 바 바다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가서 그 지극한 정성을 다 했사오니 실상 마땅히 작호를 올려 주어 각각 칭호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성조에서는 특별히 제수해 주시옵소서”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모두 각각 군호를 주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학자가 많다. 북위가 한반도 서해안의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가 대륙에도 진출해 있었다면 전혀 무리없는 기록이 된다. 그럼 과연 이 시대 중국대륙에 영토를 확보하여 운영할 만한 국력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을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는 동성왕 대에도 자국의 영토 밖에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 하였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20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열도에도 없었고 백제에도 없었다. 이 때부터 서기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장할 때까지 그의 흔적이 모호하다.

상대적으로 5세기의 신라는 백제의 몰락을 즐기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3 년 (481) 봄 2월 비열성(比列城)에 거동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소지왕 8 년(486) 봄 정월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군 땅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 2월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 낭산(狼山)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국력은 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중원을 넘보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 때 쌓은 삼년산성과 굴산성은 서기 554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는 곳이며 이 곳에서 대전지역을 돌파하면 바로 백제의 수도 부여를 칠 수 있는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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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5일 목요일

24. 유우랴쿠(雄略) 천황

  
만요우슈우(万葉集)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 경에 걸쳐 편찬된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노래모음이다. 천황, 귀족에서 하급관리, 사키모리(防人, 변경방위병) 등의 여러가지 신분의 인간들이 부른 4500수를 넘는 노래로 서기 759년(天平字3年) 이후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만요우슈우는 전권 20권으로 되어 있는데 유랴쿠(雄略)천황의 오호미우타(御製歌)가 권일(卷一)의 첫번 째 노래로 등장한다. (Wikipedia)

(원전) (毛與 美母乳 布久思毛與 美夫君志持 此岳 菜採須兒 家告閑 名告紗根 見津 山跡乃國者 押奈手 吾許居 師吉名倍手 吾己座 我許背齒 告目 家呼毛名雄母) (11番)
    
(번역) 바구니, 이쁜 바구니를 안고, 호미, 조그만 호미를 쥐고, 언덕에서 나물 캐는 아가씨여, 집이 어딘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다오, 이 야마토 국은 모두 내가 다스려요, 이것이 나를 대는 거야, 이름을, 집을,

유우랴쿠(雄略)천황은 서기 420년 대의 인물로 보인다. 아마 백제의 곤지(昆支)보다 20년 정도 연상일 것이다. 인교우(允恭)의 아들이다. 유우랴쿠의 맏 형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황자가 아버지를 독살한 453년 유우랴쿠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부왕을 살해한 카루황자의 범죄를 단죄한 것은 신라의 파진찬 김무(金波漢紀武)였고 김무는 그 길로 야마토의 권력을 장악하고 안코우(安康)천황이 되었다.

오오하쯔세 와카타케(大泊幼武, 유우랴쿠의 이름)는 부왕의 시해사건에 대하여 정의가 실현되는 동안 아무공헌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서기 456년 김무(金武, 안코우 천황의 신라 이름)가 살해되자 유우랴쿠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왕위 계승권자들을 하나 하나 살해하였다. 친 형 두명을 죽이고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市押磐皇子)를 오우미까지 찾아가 살해했다.

서기 432년 인교우(允恭)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을 때 전왕 리쮸우(履中)의 아들,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市押磐皇子)는 오우미(近江)의 카야노(蚊屋野, 현 滋賀県蒲生郡)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고구려의 피를 이은 유라쿠는 서기 456년 10월 오시하황자의 거처를 찾아 살해하였다.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 때 제거된 오시하 황자의 어린 자식들이 고난에 찬 도피생활을 헤치고 백제의 개로와 곤지에 의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 내게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와 두 남 동생 닌켄(仁賢)과 켄조우(宗)천황이다. 

일본서기는 21대 유우랴쿠(雄略) 천황이 서기 457년 즉위하여 479년 사망했다고 하였으며 재위시의 역사를 정교하게 기록하였다. 백제의 개로왕과 겹치는 그의 재위기간 중 서기 461년 백제의 곤지가 열도에 들어왔고 시마왕(후일의 백제 무령왕)의 탄생기사가 있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대사건이 그의 임기 중에 일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사기의 유랴쿠 천황 기록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그의 기록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가족사항
2) 하얀 바둑이 헌상
3) 미와강의 소녀
4) 요시노강의 소녀
5) 카즈라기산의 신(神)
6)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

고사기는 가족사항에서 유우랴쿠 천황에게 2명의 자식을 기록하였다. 자식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그의 재위기간이 의외로 짧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그의 재위기간에 방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의 기사 가운데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애매한 설화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도 사춘기의 천황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가 네 편이나 실려 있다. 712년 편찬된 고사기에 없는 유우랴쿠의 역사기록이 왜 720년 나온 일본서기에는 정교하고 방대하게 기록되어 있을까? 

5세기 중반 열도에서 이질적인 왕권이었던 인교우, 안코우, 유우랴쿠 시대가 사라지고 475년의 한성백제 멸망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질적인 인교우, 안코우, 유우랴쿠 시대를 청산하는 것이 서기 461년 열도에 들어 온 곤지(昆支)의 사명이었다. 서기 456년 정권을 장악한 유우랴쿠가 권좌에 있었던 것은 단기간에 불과하다. 겨우 1 – 2년일 것이다.

곤지(昆支)는 유우랴쿠 이후 479년까지 실제로 열도를 통치한 왕이었다. 열도 전역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약 30년에 걸친 통치의 잔재를 소탕하였다. 일본서기는 곤지의 통치기간에 벌어진 일을 모두 유우랴쿠 치세의 일로 기록하고 유우랴쿠가 479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백제가 역사에 너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큐유슈우 쿠마모토(熊本)현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고분의 대도와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나온 철검에 쓰인 와카다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란 이 시대의 곤지(昆支)를 말한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多加利足尼其已加利獲居其名多加披次獲居其名多沙鬼獲居其名半比(表)其名加差披余其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나온 철검에는 신해년(서기 471년)이란 확실한 명문이 확인되었다. 큐우슈우의 아리아케 해(有明海) 안쪽 깊숙한 쿠마모토현 타마나(玉名)군과 칸토오(關東)지방의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는 거리상으로 옛날 사람의 왕래가 없을 것 같은데,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무덤 속에서 같은 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철검과 대도가 발견되었다. 곤지(昆支)의 발걸음이 열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 곤지의 왕명) 천황기에 그의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고사기의 설화 가운데 하얀 바둑이 헌상, 미와강의 소녀, 요시노강의 소녀,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의 4개의 기사는 모두 사춘기 젊은이들의 연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사춘기의 천황(?)이 미모의 소녀를 보고 풋풋한 사랑을 전하는 내용인데 그 가운데 미와강의 소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 어느 때 천황이 놀러 나가 미와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빨래하던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이름을 아카이코(赤猪子)라 하나이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그리고 천황은 궁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카이코가 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기다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마르고 늙어 젊은 날의 미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생 동안 기다렸다는 내 마음은 전하고 죽어야  해. 그녀는 천황에게서 받은 정표를 챙겨 천황을 찾아갔다. 천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어디서 온 할멈이냐?” 하고 물었다. “모년 모월 천황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렀나이다.  늙어 볼 품 없는 모습이 되었으나 제 마음만은 전해 드리고자 오게 되었나이다.”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놀라고 미안하여 마음 속으로 이제라도 받아 들여 혼인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늙은 모습에 주저하였다.

미와강의 소녀라는 이 설화와 만요우슈우 1권에 1번으로 기록된 유우랴쿠 천황의 오호미우타(御製歌)는 너무 비슷하다. 두 노래 모두 유우랴쿠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모순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우랴쿠는 사춘기였을 때 천황이라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우연이 왕위가 빈 사이 왕위를 차지 하였다. 따라서 노래 속의 사춘기의 천황은 유우랴쿠가 아닌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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